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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틈새의 악의

점심시간의 소동 이후, 최진호 주임의 괴롭힘은 더욱 음습하고 교묘해졌다. 대놓고 시비를 거는 대신, 내 업무 성과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오후 4시. 나른한 오후의 공기를 가르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내 자리 뒤에서 멈췄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야, 이한결. 아까 팀장님이 시킨 ‘경쟁사 앱 분석 보고서’, 다 했냐?”

최 주임이 의자 등받이를 툭 치며 물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탐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네, 초안 작성했습니다.”

“그거 나한테 메일로 보내놔. 내가 검토하고 취합해서 팀장님께 보고할 테니까.”

뻔한 수작이었다. ‘검토’와 ‘취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아래, 내 보고서 표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갈아 끼우려는 속셈. 그는 내가 갓 들어온 신입이니, 위계질서라는 명분으로 찍어 누르면 꼼짝 못 하고 바칠 것이라 믿고 있는 눈치였다.

예전의 나라면 당황해서 파일을 넘겨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억울해하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순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더 이상 당하지 않아. 내 노력은 내가 지킨다.’

나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키보드 위에 올린 손가락을 멈추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부분은 이미 팀장님께 직접 메일로 드렸습니다.”

“…뭐?”

최 주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뭔데 직접 보고를 해? 사수 거치라고 안 배웠어? 위아래도 없어?”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으르렁거렸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했지만, 그 속엔 날 선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팀장님께서 급한 건이니 작성되는 대로 바로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중간 보고 단계를 거치면 늦어질 것 같아서요. 아, 물론 참조(CC)에 주임님도 넣었습니다. 확인 못 하셨나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박 팀장은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불필요한 중간 단계를 극도로 싫어했다. 나는 그 점을 철저히 이용했을 뿐이다. ‘참조’에 그를 넣음으로써 절차를 무시했다는 비난도 피했다. 완벽한 방어였다.

“너… 지금 나 멕이는 거냐?”

최 주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할 말이 없어진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거렸다. 그때, 파티션 너머에서 박 팀장이 벌떡 일어났다.

“어, 이한결 씨! 방금 보낸 보고서 봤어요.”

박 팀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분석 포인트가 아주 날카롭네. 특히 경쟁사 UI 뎁스(Depth) 비교한 거, 아주 좋았어. 바로 임원 보고 자료에 넣을게. 잘했어!”

공개적인 칭찬. 그것은 최 주임의 탐욕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최 주임은 입을 뻐끔거리다, 팀장과 나를 번갈아 보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참함과 분노가 뒤섞인 기괴한 표정이었다.

“아… 네. 한결이가… 잘했네요.”

그는 쥐어짜듯 대답하고는, 나를 향해 소리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두고 보자, 이한결.”

그의 뒷모습이 패배감으로 구부정했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 구석에 뜬 ‘발송 완료’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는 듯한 쾌감이 밀려왔다. 기억을 조작해서 얻는 찝찝한 승리가 아니었다.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악의를 막아낼 방법은 있었다. 그것은 ‘원칙’과 ‘속도’, 그리고 내 실력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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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001: 내 눈을 보면 안 돼 - 제5화. 데이터와 진심

제5화. 데이터와 진심점심시간의 소동 이후, 나는 투명 인간이 되기로 자처했다.도수 없는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썼다. 그것은 내 눈을 가리는 얇은 방패이자,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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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댕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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