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이전 글 : https://thepin.tistory.com/221

연금술 이후의 금 3화 – 카페의 대화

카페 창밖으로는 퇴근 시간대 버스들이 천천히 흘렀고, 손에 든 폰 화면에는 여전히 금 선물 시세 차트가 들쭉날쭉 뛰고 있었다.

“그래도, 진짜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때 맞은편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민서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야, 중앙은행 애널리스트 양반이 이런 시간에 카페에서 캔들차트나 보고 있어도 되는 거야?”

“……진우?”

민서는 눈을 깜빡였다.
소행성 채굴 사진이 SNS 피드를 장식하던, 그 우주공학과 동기 얼굴이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에 비해 눈 밑 그늘이 조금 더 짙어졌을 뿐.

“오랜만이다. 자리 비었길래 그냥 앉았어. 나 기억은 하지?”

“기억 안 나면 내가 문제지. 우주에서 돌 캐던 사람 아니야, 지금은?”

“캐긴 뭘 캐. 이제는 ‘우주에서 쓸 자원 인프라 기업’이래.”
진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투자자들 앞에서는 ‘금’이란 말도 조심해서 꺼내야 돼.”

민서는 피식 웃다가,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차트의 붉은 봉과 초록 봉이 뒤엉켜 있는 그래프가 마치 할 말을 잃은 심전도처럼 보였다.

“그래프가… 많이 아프네.”

“그래프가 아픈 거야, 사람들이 아픈 거야?”
진우가 물컵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너희 쪽은 어때? 중앙은행 지하 금고는 아직 멀쩡해?”

“물리적으로는 멀쩡하지. 금괴야 갑자기 녹아 없어지진 않으니까.”
민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신뢰 같은 건… 조금씩 녹고 있는 것 같긴 해.”

“랩그로운 골드 때문이야? 아니면 우리 같은 우주 광부들 때문이야?”

“둘 다지, 뭐.”
민서는 폰을 잠시 뒤집어 내려놓았다. “오늘 낮에 내부 보고서 하나 받았거든. 아직 공식 발표 전이라 밖에는 안 나갔을 텐데.”

“또 무슨 무서운 그래프냐.”

“합성 금 생산 단가 곡선. 그리고 전통 광산 채굴 단가 곡선.”
민서는 손가락 두 개로 공중에서 서로 만나는 선을 그려 보였다. “드디어, 교차점이 보이더라.”

진우가 잠시 웃음기를 거두었다.

“진짜야? 기사에서 떠드는 ‘환경친화적 랩그로운 골드’ 그쪽?”

“응. 발표에 나온 건 훨씬 순한 버전일 거고, 내부 자료 기준으론 ‘연간 수천 킬로그램’ 이야기가 슬슬 나와.”
민서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물론 여전히 싼 건 아니야.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걸 시장이 알아버렸다는 거지.”

“희소성이 깨지는 순간?”

“희소성의 ‘미래 기대’가 깨지는 순간.”
민서는 정정하듯 말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금을 사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계산을 다시 하기 시작하는 거야. ‘혹시 이게, 마지막 골든 에이지가 아닐까’ 이런 식으로.”

진우는 잠깐 창밖을 봤다.
버스 정류장 광고판 위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로고가 지나갔다.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 소행성 자원”이라는 문구가 함께 떠 있었다.

“웃긴 게 뭔지 알아?”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그 반대 그림을 그리고 있었거든. ‘우리’ 때문에 금이 흔해질 수도 있다는 상상.”

“소행성 하나만 제대로 캐면, 지구 역사상 채굴량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을 수 있다… 그거?”
민서가 되물었다.

“대충 그런 밈들 있잖아.”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정작 우리가 첫 샘플 조금 가져오는 동안, 지구에서는 실험실에서 금을 찍어내는 방법을 먼저 찾아버리는 거지. 우주공학자 입장에선 좀 기분이 묘해.”

“지구에서 만든 금 vs 우주에서 가져온 금.”
민서는 그 말을 되뇌었다. “경제학자 입장에선 둘 다 숫자일 뿐이지만,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이야기가 다르겠지.”

“중앙은행은 뭐래? 랩그로운 금을 준비자산으로 인정할 거야, 말 거야?”

“공식 입장은 아직 같지. ‘우리는 시장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으며, 금은 여전히 중요한 준비자산이다.’”
민서는 말끝을 흉내 내며, 일부러 관료적인 톤을 냈다. “비공식적으로는… 의견이 갈려. 천연 금만 지키자는 쪽, 랩그로운 금도 섞어서 받자는 쪽, 아예 금 비중 줄이고 다른 실물자산이나 디지털 자산 늘리자는 쪽.”

“너는?”

민서는 잠시 대답을 못 했다. 대신 종이컵 뚜껑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금이 좋았거든. ‘인류가 몇 천 년 동안 믿어온 물건’이라는 사실 자체가 주는 안정감이 있었어. 데이터나 토큰은 역사가 짧잖아.”

“근데 이제 그 금도, 실험실에서 6개월짜리 역사로 만들어진다는 거지.”

“그러니까.”
민서는 웃었다. “역사가 길다는 게 강점이었는데, 갑자기 ‘제조일자 2041년 5월 3일’ 이런 금괴가 시장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좀… 감성이 깨지지 않아?”

“감성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
진우가 말했다가, 곧바로 스스로 웃었다. “아, 아니다. 사실 감성이 전부지. 사람들이 믿어주니까 돈도 되는 거고.”

“그래서 내가 요즘 혼란스러운 거야.”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숫자를 보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숫자는 합성 금이 맞다’는 방향으로 가면서, 내 안에서는 ‘그래도 천연 금이 진짜지’라는 이상한 고집이 튀어나오는 거지.”

“재밌네. 과학자랑 비슷하다.”
진우가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도 결국 데이터 보고 설계하고 검증하는 거지만, 은근히 ‘우주에서 가져온 건 특별하다’는 미신 같은 자부심이 있어.
근데 랩그로운 금 얘기 나오는 순간, 갑자기 우리가 하는 일이 되게 구식 노동처럼 느껴지는 거야.”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창밖 하늘에는 아주 옅게 달이 떠 있었다.

“그럼, 상상해 보자.”
민서가 먼저 말을 이었다. “랩그로운 금이 진짜로 싸지고, 너희가 소행성에서 금을 톤 단위로 들여올 수 있게 됐다고 치자.”

“꿈같은데, 악몽 같기도 하고.”
진우가 중얼거렸다.

“금값이 내려가고, 금의 희소성이 사라지는 건 둘 다 알잖아.
그 다음에는 뭐가 제일 귀해질까?”

진우가 민서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은 단순한 경제학 문제가 아니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시간?”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로 현장에서, 위험하게 뭔가를 만들고, 고치고, 날려 보는 시간. 그건 아직 실험실에서 복제 못 하잖아.”

“흠.”
민서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좋네. 나는… ‘합의’라고 생각했거든.”

“합의?”

“우리가 ‘이게 가치 있다’고 같이 믿기로 한 합의. 예전에는 그게 금이었고, 요즘은 어떤 나라에선 달러, 어떤 커뮤니티에선 비트코인 같은 거고.”
민서는 다시 폰을 뒤집어 들었다. “랩그로운 금이든 우주 금이든, 결국 숫자로 섞이는 순간이 올 텐데… 그때 사람들은 뭘 붙들고 싶어 할까 싶어서.”

“너네 집은, 금에 대한 기억이 어때?”

진우가 물었다.

“우리 집은, IMF 때 집을 잃을 뻔했거든.”
민서가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때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게,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금 반지랑 목걸이였어. 다 팔아서 겨우 대출 일부 막고, 집은 지켰지.”

“그래서구나.”
진우가 중얼거렸다.

“그 이후로 우리 집에서 ‘금’이라는 단어는, 그냥 귀금속이 아니었어.”
민서는 웃었다. “위기 때 집을 살려준 노란색 금속. 그래서 나도 금을 볼 때, 숫자보다 먼저 그 기억이 떠올라.”

“우리 집은 반대였어.”
진우가 말했다. “아버지가 2008년 때 금은 안 믿고 주식만 믿다가 크게 데인 쪽. 그때 엄마가 맨날 그랬거든. ‘남들은 금 사서 버텼다는데, 넌 왜 그래프만 믿었냐’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내가 우주공학 한다고 했을 때도, 어머니가 한숨부터 쉬셨어. ‘금도 못 쥔 집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그래서일까.
한 사람은 금고를 지키는 일을 택했고, 한 사람은 우주에서 금을 캐겠다는 일을 택했다.

“그래서, 넌 뭘 믿고 싶어?”
진우가 되물었다. “금이 더 이상 희소하지 않게 되는 세상에서.”

민서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종이에 적힌 문장을 다시 한 번 눈으로 읽었다.

What happens when gold is no longer scarce?

그 질문은, 단지 금의 가격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할지를 묻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일단은…”
민서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금이 더 이상 희소하지 않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어.”

“관찰자 모드?”

“관찰자 겸, 약간의 공범.”
민서가 웃었다. “우리가 준비자산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그 과정에 속도가 붙을 수도, 완충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원래 그랬으니까 그냥 간다’는 쪽에는 서고 싶지 않아.”

“괜찮네, 그거.”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희소성을 가져와서, 어떤 희소성을 무너뜨리는지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싶고.”

“그럼, 이렇게 해보자.”
진우가 말했다. “나중에 진짜로 우리 회사가 소행성에서 금덩어리 하나 가져오면…”

“…”

“너네 지하 금고에, 그거 한 줄만 끼워 넣어 줘.”
진우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올렸다. “그러면, 거긴 진짜 우주의 역사 박물관이 되는 거잖아. 천연 금, 랩그로운 금, 우주 금. 풀세트.”

민서는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너도 약속해.”
그가 웃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언젠가 너희 회사가 우주 금을 가져와서 금값을 박살 내면…”

“…”

“나, 그때는 진짜로 우주 자산 담당 애널리스트로 이직해서, 너 옆자리 차지할 거니까.”

“와, 중앙은행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이라.”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금값 붕괴보다도 충격적인 이벤트일 텐데?”

“금의 시대가 끝나면, 나도 좀 다른 걸 믿어보고 싶어서.”
민서는 창밖에 떠 있는 옅은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를 들어, 금이 아니라…
우주를 믿는다든가.”

진우도 함께 밖을 봤다.
울퉁불퉁한 회색 구체가 도시 불빛 사이로 희미하게 떠 있었다.

“좋네, 그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 다음에 믿을 만한 걸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다음 글 : https://thepin.tistory.com/219

728x90
Posted by 댕기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