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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지하 금고의 시간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금속과 콘크리트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중앙은행 금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민서는 습관처럼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도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미 수십 번 했던 안내 멘트였고, 오늘 따라 견학을 온 사람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와 최신형 보안 로봇 하나뿐이었다.

로봇의 광학 센서가 그를 향해 한 번 깜박였다. 인식 완료, 출입 허용.
민서는 출입카드를 터치하고, 금고 구역으로 이어지는 무거운 철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는 동안,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매번 문이 열릴 때 들리는 낮고 둔탁한 쇳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살짝 비현실적인 소리였다.
위층에서는 오늘도 주가지수, 환율, 채권금리가 실시간으로 변하는 차트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을 텐데,
이 아래층에는, 마치 시간 자체가 느려진 것 같은 이 소리만 존재했다.

철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4층 높이의 천장 밑, 규칙적으로 늘어선 선반들.
선반마다 일정 수의 금괴가 수평으로 정갈하게 쌓여 있었고, 각 금괴의 옆면에는 작은 숫자가 음각으로 찍혀 있었다.
중량, 순도, 출처, 연도.

민서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나 이 풍경을 볼 때면, 조금은 무대 뒤편에 들어온 역할 배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뉴스에서 “국가의 신뢰를 뒷받침하는 금 준비자산”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제로는 이렇게 고요하고 차갑게 누워 있다는 걸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잘 계시네요. 선생님들.”

말을 건다고 해서 금괴가 대답해 줄 리는 없었지만, 민서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금은 말을 하지 않지만, 대신 숫자로 말한다.
그게 그의 일의 전부이기도 했다.

그는 태블릿을 켜고, 오늘 점검해야 할 랙 번호를 확인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들어온 금괴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한 켠에는 몇 년 전, 근지구 소행성에서 가져온 첫 공식 귀금속 샘플도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중량으로 치면 아무 것도 아닌 양이었지만, 언론은 그걸 두고 한참이나 “우주 금 시대의 개막”이라고 떠들어댔었다.

민서는 그 작은 바를 지나치면서,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빛깔만 놓고 보면, 여기 있는 다른 금괴들과 차이를 찾기 어려웠다.
태양계 초창기 먼지에서 뭉쳐진 것이든, 지구 깊은 곳에서 열수 작용으로 농축된 것이든, 아니면 로켓으로 실어온 소행성 조각이든.
결국 인간이 보는 건 색, 무게, 숫자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우주 금’이라면 눈이 반짝이지.”

민서는 혼잣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경제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도, 이런 감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가 이곳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사실은 아주 실용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통화정책과 금본위제도를 공부하던 시절, 교수는 칠판에 오래된 금화 그림을 그려놓고 말했다.
“사람들은 금 자체를 믿은 게 아니라, 금을 둘러싼 합의를 믿은 겁니다. 그래도 금은 그 합의가 금속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는 드문 사례죠.”

민서는 그 말을 듣고, 언젠가 실제 금괴를 눈으로 보는 일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매일 이 금고를 출근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태블릿의 체크리스트를 따라 몇 개의 선반을 훑고 나면, 자동으로 시스템이 재고와 수치를 비교해 준다.
위반, 이상 없음.
숫자만 놓고 보면 완벽한 질서였다.

문제는, 숫자 이면의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데 있었다.

금고 끝 쪽,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랙 쪽에는 전통적인 광석 채굴이 아닌, 재활용 금속에서 정련한 금괴들도 섞여 있었다.
인류가 쓰고 버린 전자제품에서 다시 추출한 금이었다.

민서는 선반 앞에 잠시 서서, 가장 오래된 금괴들이 모여 있는 쪽을 바라봤다.

이 중 일부는, 책에서만 읽었던 시대를 직접 통과해온 금괴들이었다.
전쟁이 나자 국경을 넘나들며 몰래 옮겨지던 금, 어느 정권이 무너질 때 비밀스럽게 외국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금,
외환위기 때 시민들이 결혼반지와 금목걸이를 모아 바꿔치기 했다는 기사 속의 금.

그때마다 뉴스는 비슷한 그래프를 보여줬다.
전쟁, 쿠데타, 증시 폭락, 통화가치 붕괴…
위험한 단어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 화면 한켠에서는 항상 금 시세 차트가 우상향으로 치솟고 있었다.

“불안하면 사람들은 금을 샀지.”
민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집도, 주식도, 통화도 믿기 힘들어지면, 결국 이 황금색 덩어리 쪽으로 도망 왔어.”

그게 그가 금을 좋아한 이유이기도 했다.
금은 단지 반짝이는 금속이 아니라, 불안의 시대를 견디기 위해 사람들이 쥐고 있던 마지막 손잡이였으니까.

그리고 어제, 민서는 새로운 종류의 금괴 하나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랩-grown…”
그는 천천히 그 단어를 떠올렸다.

합성 다이아몬드처럼, “실험실에서 자라난 금”.
어제는 그 테스트 샘플을 처리하는 회의가 있었다.

순도는 99.99%로 표기되어 있었고, 물리적·화학적 검증 결과만 놓고 보면 기존 금괴들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바코드와 데이터베이스 상에서, 그 금괴 옆에는 작은 태그가 붙어 있었다.

Origin: Lab-Created

“금고에 들어온 첫 번째 합성 금괴.”
민서는 어제 그걸 보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중앙은행은 아직 그 금괴를 공식 준비자산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단계에선 단지 실험용 샘플, 그리고 미래 검토를 위한 참고 자료.

하지만 번호가 부여되고, 리스트에 올라가고, 무게와 순도가 기록되는 순간부터,
그 금괴는 어느 정도까지는 이 시스템의 언어를 배운 셈이었다.

민서는 발걸음을 돌려, 오늘 확인 대상이 아닌 랙 쪽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갔다.
합성 금 시제품이 보관된 작은 칸막이가 가까워졌다.

선반 위, 조명 아래에서 금괴는 다른 금들과 다를 바 없이 빛났다.
표면의 미세한 스크래치까지 완벽하게 정련된, 반듯한 직육면체.

그 옆에는 출처 코드가 짧게 적혀 있었다.
‘LG-01’. Lab-Grown 1호.

“처음 본 건데, 이상하게 안 어색하네.”

민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처음 카드 결제를 할 때도 현금이랑 느낌이 달랐어야 하는데, 금방 익숙해졌지. 아마 이것도 그런 식으로 스며들겠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서 느릿한 저항감이 올라왔다.
이곳에 있는 금괴들은, 전부 수십 년, 길게는 수십 세대에 걸친 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전쟁과 외교, 무역과 위기, 국부의 축적과 유출.

그런데 이 조그만 직육면체는, 불과 몇 달 전에 실험실에서 “제조”되었다.

역사가 너무 짧았다.
그 사실이 민서에게 이상하게 걸렸다.

“역사가 짧다는 게 왜 문제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가 믿는 건 결국 현재의 신뢰, 현재의 담보력일 뿐인데.”

경제학자 모드의 민서는 그렇게 답하려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금괴들 사이를 걸을 때만큼은, 그는 자신이 조금 더 감성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태블릿이 진동을 울렸다.
새로운 메일 알림.

민서는 금괴에서 시선을 떼고 화면을 열어 보았다.
제목은 간단했다.

[Confidential] Lab-Grown Gold Production Cost Curve – Internal Review Draft

보낸 사람은 본부 리서치국.
참조에는 통화정책국, 국제국, 그리고 그가 속한 자산운용국이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민서는 메일을 열었다.

최근 민간 연구기관 A사에서 발표한 랩그로운 금 파일럿 플랜트 결과를 분석한 내부 보고서 초안입니다.
생산 단가 추이와 기존 광산 채굴 비용 비교 그래프를 첨부하오니, 준비자산 전략 검토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크롤을 내리자, 익숙한 모양의 그래프가 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곡선.

하나는 전통적인 금광 채굴의 평균 비용을 나타낸 완만한 선.
다른 하나는 랩그로운 금 공정의 예상 생산 단가를 나타낸, 가파르게 내려가는 선.

두 선은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반드시 만날 것처럼 보였다.

민서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 그래프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는, 복잡한 수학이 필요하지 않았다.

“희소성의 이론적 붕괴 시점.”

누군가 보고서 안에서 그렇게 표현해 두었다.

그는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래프를 좀 더 확대했다.
당장 내년이나 내후년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보고서 작성자의 보수적인 가정을 고려해도, “우리 세대 안”이라는 사실이 선명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알람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바닥을 울렸다.
어디선가 또 환율이 튀고, 주가지수가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민서는 잠시 그래프를 닫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그래 왔듯, 침묵 속에서 반사된 빛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당신들의 시대가… 정말로 끝날 수도 있겠네.”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값의 등락은 그저 그래프 위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그래프 뒤에 “생산 기술의 변화”라는 실체가 붙기 시작했다.

합성 다이아몬드가 등장하고, 천연 다이아몬드 가격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업계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이 조금은 이해됐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사람들은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

민서는 태블릿을 끄고 다시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지하 금고의 공기가 처음 내려올 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그는 방금 본 그래프를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 보았다.
하나는 천천히 오르거나 유지되는 선.
다른 하나는 기술 발전과 함께 내려가는 선.

“저게 만나는 날, 세상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문이 열렸다.
그가 올라탈 층은 지상 1층, 통화정책국과 자산운용국이 함께 있는 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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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댕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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