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 https://thepin.tistory.com/222

2화 – 그래프와 사람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번에는 금속 냄새 대신 사람 냄새가 밀려들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서성이는 직원들, 모니터 앞에 박혀 있는 애널리스트들, 복도 끝 회의실 앞에서 대기 중인 방문객들까지.
지하의 고요함은 한 층 위로 올라오는 순간 곧바로 소음으로 바뀌었다.
“민서 씨, 딱 맞춰 오셨네요.”
복도에서 민서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자산운용국 팀장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항상 정리된 넥타이, 표정은 친절하지만 눈빛은 숫자만 보는 사람 특유의 날카로움이 있었다.
“예, 방금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길입니다.”
“금고는 아직 잘 버티고 있죠?”
팀장이 던진 농담 섞인 질문에, 민서는 잠시 말을 골랐다.
“물리적으로는, 네. 아주 잘 버티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요. 시장이야 뭐, 늘 요란하니까.”
팀장이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회의실 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시죠. 오늘 리서치국에서 재미있는 자료가 하나 올라와서요.”
회의실 안에는 이미 여러 부서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국제국 담당자, 리스크 관리팀, 통화정책국 분석관 몇 명, 그리고 민서와 같은 자산운용국 애널리스트들까지.
책상 위에는 종이로 출력된 그래프와 요약 보고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보고서 표지에는 커다랗게 “내부 검토용 – 외부 반출 금지”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리서치국에서 나온 발표자가 앞쪽으로 나와, 슬라이드를 띄웠다.
스크린에는 지하에서 봤던 것과 거의 같은 그래프가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민간 연구기관 A사에서 발표한 랩그로운 금 파일럿 플랜트 결과를 분석한 내용입니다.
핵심은 여기, 두 개의 곡선입니다.”
발표자는 레이저 포인터로 그래프를 가리켰다.
빨간 선이 전통 금광 채굴 평균 비용, 파란 선이 랩그로운 금 공정 비용 추정치였다.
“보시다시피, 현재 시점에서는 여전히 전통 광산 쪽이 비용 면에서 유리합니다.
하지만 A사의 공정 효율 개선 계획이 일정대로 진행될 경우, 보수적으로 잡아도 15년에서 20년 사이에 두 곡선이 교차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나옵니다.”
회의실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펜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국제국 담당자가 그래프를 보다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2008년 생각나네요.”
회의실 몇몇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증시 박살 나고, 은행들 쓰러지던 시기요. 그때도 다들 ‘이번엔 시스템이 진짜로 끝나는 거 아니냐’고 했었죠.”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유일하게 올라가던 게 금이었잖아요. 통화도, 채권도, 부동산도 못 믿겠을 때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게 이거였는데…”
그는 탁자 위 보고서에 인쇄된 금괴 사진을 한 번 내려다봤다.
“이제 그 금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좀 무섭습니다.
마지막 피난처를 누가 마음만 먹으면 늘릴 수 있는 거잖아요.”
민서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 역시 붉은 그래프와 함께 올라가던 금 시세 차트를 TV로 본 세대였다.
집집마다 “금이라도 조금 사둘까”라는 대사가 오가던 시절의 공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랩그로운 금의 생산단가 곡선은,
단지 공급과잉의 그래프가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속에 만들어 두었던 방공호 벽이 얇아지는 그래프로도 보였다.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술적 가정은 충분히 보수적으로 잡으신 거죠? 민간 스타트업 발표를 그대로 가져온 건 아닐 테고.”
“물론입니다.”
리서치국 발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너지 단가, 설비 감가상각, 환경 규제 비용까지 포함해서, 그들이 제시한 수치보다 20~30% 정도는 더 보수적으로 반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선의 방향성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국제국 쪽 담당자가 손을 들었다.
“합성 다이아몬드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브랜드가 ‘천연’과 ‘합성’을 잘 구분해 수요를 나눴습니다. 금도 그렇게 가지 않을까요? 준비자산용 천연 금과, 산업용/장식용 랩그로운 금으로.”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발표자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그래서 이번 보고서는 세 가지 케이스를 나눠 분석했습니다.
A: 천연 금만 준비자산으로 유지하는 경우,
B: 랩그로운 금을 일부 비율로 편입하는 경우,
C: 금 비중 자체를 줄이고 다른 실물자산 또는 디지털 자산으로 대체하는 경우.”
민서는 슬쩍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각 케이스 옆에는 통화 안정성, 대외 신뢰도, 유동성, 정치적 부담 같은 항목들이 점수로 매겨져 있었다.
팀장이 갑작스럽게 민서를 향했다.
“민서 씨 의견은 어떻습니까?”
여러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민서는 순간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경제학적으로만 보면, 결국 문제는 ‘구분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분 가능성이라면?”
“네. 금속 자체의 물리·화학적 속성으로 천연과 랩그로운을 구분할 수 없다면,
우리가 둘 사이를 다르게 취급하는 건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합의의 문제입니다.”
민서는 손가락으로 보고서의 한 구석을 톡 건드렸다.
“지금 보고서에서도 언급됐듯이, 랩그로운 금은 아직까지 전체 공급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합니다.
하지만 단지 ‘생산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장은 미래의 희소성을 다시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당장 천연 금을 버릴 수도 없고요. 준비자산의 상징성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민서 씨 개인적인 의견은? A, B, C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회의실 안의 시선이 다시 모였다.
민서는 잠시 생각한 뒤, 솔직하게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A와 B 사이에서, 장기적으로는 B와 C 사이에서 움직이게 될 거라고 봅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지금 당장 B나 C를 선택하면,
‘우리 스스로 금을 부정한다’는 신호를 시장에 줄 수 있습니다.
그건 금값을 떠나서, 자국 통화와 정책에 대한 신뢰 문제로 번질 수 있고요.”
그는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랩그로운 금 생산이 실제로 시작되고, 공급이 매년 꾸준히 늘어나는 게 확인되면,
금의 희소성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준비자산으로서의 위상도 자연스럽게 바뀔 겁니다.
그때는 B, 즉 일부 편입과, C, 다른 자산으로의 분산이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국제국 담당자가 끼어들었다.
“그 ‘다른 자산’에는 뭐가 들어가나요?
달러? 위안? SDR?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 통화나 토큰류?”
민서는 어깨를 살짝 올렸다.
“그건… 제 소관은 아니죠.”
회의실 안에 가벼운 웃음이 돌았다.
팀장은 그 틈을 타 다시 발표자에게 질문을 돌렸다.
“우선은, 오늘 자료는 참고 수준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공식 입장을 정하려면, 정치적인 레벨에서의 판단도 필요하니까요.
다만, 내부적으로는 랩그로운 금과 관련된 시장 동향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체계를 만들어야겠네요.”
회의는 그렇게 큰 결론 없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보고서가 회수되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각자의 일정으로 흩어졌다.
민서도 서류를 정리해 들고 일어서려다가, 책상 위에 떨어진 한 장의 종이에 눈길이 갔다.
“이건 뭐지…”
누군가 출력했다가 흘린 듯한, 짧은 메모였다.
상단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What happens when gold is no longer scarce?”
그 아래에는 서너 줄의 메모가 더 있었다.
- 금 = 희소성 + 역사 + 상징성
- 랩그로운 금 = 희소성 약화, 역사 단축, 상징성 분열
- 우주 금(소행성) = 희소성 붕괴 가능성, 하지만 새로운 서사의 등장
민서는 종이를 한 번 더 읽어보고, 조용히 접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누군가의 사적인 정리일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문장이었다.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복도는 여전히 분주했다.
어딘가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졌고, 다른 어딘가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환율 얘기가 오갔다.
폰 화면이 진동과 함께 켜졌다.
메신저 알림 하나.
진우: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 도시락 대신 커피 한 잔 사 줄게. 금 얘기도 좀 해야지.”
민서는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민서: “지금 막 금고에서 올라왔는데, 금 얘기 말고 할 얘기가 있을까?”
진우: “그럼 금 얘기부터 하지 뭐. 7시에 예전 학교 앞 카페 기억나? 거기서 보자.”

'VibeCoding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화 지하 금고의 시간 . 연금술 이후의 금 .N003 (0) | 2026.03.08 |
|---|---|
| 3화 카페의 대화 . 연금술 이후의 금 .N003 (0) | 2026.03.08 |
| 4화 포럼, 그리고 이후의 금 . 연금술 이후의 금 .N003 (0) | 2026.03.08 |
| 소설001: 내 눈을 보면 안 돼 (0) | 2026.02.18 |
| 소설001: 내 눈을 보면 안 돼 - 이한결의 능력 상세 설정 (0) | 2026.02.18 |



